네! 마침내 첫 글을 써냈습니다. 블로그를 열기도 전에 블로그에 올라갈 글을 마침내 쓰고 만 거예요. 별 것 아닌 일 같지만 이 배경에는 경험과 배경이 있기 때문이랍니다.

새 해가 되어서 문구점에 가서 다이어리를 열심히 산 경험이 있어요. 시내에 있는 몇 층짜리 빌딩을 통째로 쓰고 있는 큰 문구사에 설레는 마음으로 들어가서, 열심히 쓸 다이어리니까 열심히 고르고 다이어리에 쓸 펜과 지우개까지 고르고 또 골라 산 뒤 버스를 타고 집에 가면 배고프고 기운 빠지고 쓸 것이 없어서 다이어리에 이름만 적고 책장 속에 고이 모셔두는 것으로 신년맞이 다이어리 쇼핑을 끝내게 되는 그거요. 어쩌면 쇼핑은 그 자체로 즐거운 일은 사실이지만 돈 낭비는 돈 낭비지요.

소프트웨어 개발자나 웹 개발에 몸을 담아본 사람이라면 이런 경험이 개인 홈페이지나 블로그에서도 계속 이어지게 됩니다. 홈페이지나 블로그를 새로 만들어보자는 결심이 생기고 나면 우선 무슨 소프트웨어로 블로그를 굴릴까 고민하기 시작하는데요. 고집이 센 이상한 부류는 절대 블로그를 기성 서비스에 맡기지 않아요. 양보하고 또 양보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로 그나마 웹페이지 소스 코드 수정이 자유로운 티스토리로 가고, 대부분은 VPS에 80포트를 열어놓는 짓부터 시작하게 되지요.

그리고는 텍스트 에디터를 열고 블로그 스킨을 열심히 짓고 나면 워드프레스와 텍스트큐브의 길을 선택한 개발자 블로그들의 여정은 이쯤에서 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제 여기서부터 Jekyll이나 Serum 같은 정적 페이지 빌드 도구를 쓰기로 한 집단과 그런 솔루션에서까지 환멸을 느낀 뒤 모든 것을 부정하고 직접 블로그 솔루션을 개발하기 시작한 고통의 방망이 깎는 노인 집단이 남아있는데요. 거기에다가 nginx 설정을 만져서 이미지 외부 링크를 막으려고 하거나 데브옵스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각종 첨단 기술로 무장하느라 블로그 구축은 산으로만 가게 됩니다.

각목 세 개만 실어놓은 트레일러 트럭

그렇게 혼자만의 블로그 개설 해커톤을 끝내고 나면 철야를 끝낸 직장인처럼 모든 기운이 빠지게 됩니다, 이미 블로그를 만드는 것에서 충분이 뿌듯하고 기운이 빠지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 뿌듯함과 감동의 순간을 포스트 하나에 간단하게 남기고 블로그는 끝나버린 대학 조별 과제 결과물처럼 방치되고 맙니다. 문구점 다이어리에서 있었던 비극이 개발자들에게는 개인 홈페이지와 블로그애서 되풀이되고 말아요.

결국 글쓰기를 취미로 두지 않는 사람들이 자주 벌이는 이런 재능 낭비적 실수를 막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몇 편 글을 먼저 써보고 글 쓰는 것에 재미가 들려야 합니다. 그 뒤에 워드프레스를 깔든 TCP 소켓을 열어서 HTTP 요청을 처리하는 바이너리를 만들든 해야 할 일이었던 것이었어요.

한편 최근에는 미디엄이나 브런치처럼 단정하고 블로그 포맷에서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는 플랫폼이 늘어나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 큰 결단을 내리지 않고 편하게 글을 쓰기가 좋아진 건 사실입니다. 그게 별로 여의치 않으면 트위터에다가 타래를 만들어서 글을 써도 괜찮고요. 하지만 트위터에 글을 이어가기에는 생각과 글을 정리정돈하는 데에는 그닥 좋지 못하고, 미디엄은 한국어와 한글에는 거리감이 있는 서비스죠. 브런치는 개인적으로는 카카오 서비스에 대한 좋지 못한 편견이 있어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언제 한번 정리해서 글로 정리할 날이 있을 거예요.)

결국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했고 블로그를 새로 쪄 와야 하는 일이 생겨버렸어요. 블로그를 먼저 완성하고 글을 쓰는 대신, 우선 글을 쓰고 읽을 수 있을 정도로만 블로그를 만든 뒤에 천천히 완성해나가는 걸 목표로 하겠습니다. 한동안은 블로그를 만드는 블로그가 되겠네요. 만들다가 이것저것 생각나는 점이 있으면 글을 쓰기에도 좋을 것 같네요.